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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얼간이 리뷰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청춘의 영화 2018. 12. 30. 01:47

    세얼간이


    세 얼간이

     

    사진작가가 되고 싶지만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정해준 공학자가 되기 위해 꿈을 숨기는 파르한, 지참금 없어 노처녀가 된 누나, 은퇴한 어머니,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는 대기업 취업 부담감에 살고 있는 라주, 가는 곳마다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지만 늘 성적은 최상위인 괴짜 주인공 란초까지 세 얼간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한국은 OECE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나라고 출산율은 꼴찌다. 높은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청년 실업과 경기 불호황, 직장인이 되어서도 사내정치, 일의 강도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는 가히 최고 수준이다. 인도 사회를 비판하지만 인도를 넘어 한국 그리고 세계인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영화다.

     

    맹목적인 무한 경쟁에 대한 경고 그리고 공감능력


    세얼간이


     

    누군가가 자신을 앞서가는 꼴을 못 본다. 시간 절약을 위해 단추는 찍찍이, 넥타이는 고리, 양손잡이로 동시 쓰기가 가능, 매일 오후 정각 2시엔 730초 동안 낮잠을 들으며 비서를 통해 면도와 같은 잡일을 맡긴다.

     

    다른 새 둥지의 알을 낳고 태어날 때부터 경쟁하는 뻐꾸기 둥지,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닐 암스트롱 예시를 통해 인생은 레이스라며 학생들을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몬다.


    이 사람은 바로 바이러스로 불리는 비루 총장이다.

     

    아버지가 쓰러져 두 달 동안 집중할 수 없었던 학생에게 자신의 아들이 죽은 다음날에도 강의를 했던 자신의 경험을 예시로 든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하니?’라며 이해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압박하는 총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을 아끼고 규칙적으로 누구보다 노력하며 살았던 총장의 모습은 그렇게 성공의 경험을 맛본 기성세대를 표현한다.

     

    총장과 같은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성공 기억이다. 이 기억이 너무 강하면 새로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그 자체 맥락으로 보지 못하고 성공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사건을 이해하려고 든다. 이 말은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이 봤던 세계를 끊임없이 자기에게 강제하고 또 타인에게 강요한다.

     

    밀리미터가 총장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정도로,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한 경쟁 가치관을 끊임없이 강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은 총장에게 있어 성공의 상징과 같은 볼펜을 란초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과거와 다른 현실을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인정하는 공감대 형성이 필요해 보인다.

     

    무거운 사명감을 떨쳐내라


    세얼간이


     

    주인공 란초와는 달리 친구 파르한과 라주는 각자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본인의 꿈인 사진작가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꿈인 공학자를 이루어야 하는 파르한

    가난한 집안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대기업 취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라주

    무거운 사명감에서 정작 라는 존재가 빠져있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가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동경하는 직업을 어릴 때부터 강요받는 청년들이 많이 존재한다. ‘다 너 잘 되라는 소리라는 말로 합리화를 하면서 자식의 학교와 직업을 자신의 성공으로 동일시한다.

     

    란초는 이런 친구들에게 각자 마주한 사명감과 두려움을 떨쳐내길 조언한다.

    내면의 욕망에 충실해 자기의 것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고,

    즐길 수 있어야 또 잘할 수 있고 성공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왜 웃냐고 물어보는 교수의 질문에 공학을 공부하는 게 어린 시절 꿈이었고,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웃었다는 란초의 모습에서 그가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공학이 좋아서 공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습과 권위에 대한 도전

     

    세얼간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보기 좋게 선배들을 골탕 먹이고, 총장의 연설에 거리낌 없이 난감한 질문을 한다. 밀리미터에게 교복을 사서 수업을 몰래 들으라고 하고, 아침 샤워장을 피해 밖에서 샤워를 하면서, 1학년이 4학년 수업을 듣는 란초의 모습을 우리가 봤다면 버릇없는 사람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버릇 있는 사람은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하지 버릇 있다는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말하는 당사자도 얼마 전까지 버릇이 없는 요즘 애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버릇이란 기존 집단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관습적인 체계를 말한다.

    새로운 사람은 그 체계를 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기에 버릇이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버릇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다.

     

    때로는 앞서 말한 버릇과 같은 관습은 특정한 이념에 일종의 보편성과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사회를 구분하는데 사용된다. 즉 일정한 개인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일정한 틀에 얽매이고 강요할 수 있다.

     

    학교가 아닌 공장이 된 현실

     

    세얼간이



    란초는 끊임없이 교육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총장이 28위였던 학교 순위를 1위로 끌어올렸다는 말에 대해 란초는 대학은 창의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학점, 취업에 관심이 있고 학생들은 공학이 아닌 학점 잘 받는 방법을 배운다고 말한다. 그리고 총장 손에 끌려가 강의를 강요받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시간을 1분 전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졌을 때 설레었나요? 호기심이 생겼나요? 새로운 걸 배운다는 사실에 흥분됐나요? 아뇨! 모두들 미친 듯이 레이스만 펼쳤죠. 이런 방식이 무슨 소용 있나요? 그게 지식을 늘게 해주나요? 아뇨, 스트레스만 줄 뿐이죠. 여긴 대학이지 스트레스 공장이 아니에요. 서커스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걸 배우지만 그런 사자는 잘 훈련되었다고 하지, 잘 교육되었다고는 안 합니다.”

     

    학교는 하나의 이념으로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을 강요한다. 그래서 순종이 최고의 덕목이다. 무엇을 순종할까? 성적, 공부, 학습, 대학입시, 취업 등을 잘해 낼 수 있게 만들어진 기준에 순종을 의미한다. 이 내용이 기준이 되고 그것이 절대화되어 있으면, 이 절대 기준을 근거로 학생들은 서열화된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는 이 서열화가 단순히 학습의 능력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 자체의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세얼간이에서의 나오는 엠페리얼 공업 대학교도 바로 이런 공간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의 서열화는 단순히 학습 능력을 따지는 것만 아니라, 그 학생 자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학생들은 이 기준에 의해 늘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고 자존감이 하락한다.

     

    영화에서 졸업사진을 찍을 때 앞에서부터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치하고 란초는 점수는 분열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던 이 치열한 경쟁과 획일적인 기준을 사회에 나가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그랬듯이 성적이 아닐 뿐이지 경제력에 의해 줄을 세우고 신분을 서열화한다. 학교에서 잘 교육된 주체적인 내가 아니라 잘 훈련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란초가 총장에게 한 말

    전 교수님과 달리 뒤처지는 학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의 의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창의력 실종?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항!

     

    세얼간이



    교수가 란초에게 기계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에 란초는 인간의 수고(노력과 시간)를 덜어주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교수는 책에 나와있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에 인정해주지 않는다.

    반면 소음기라고 불리며 란초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차투르는 교수가 원하는 사전적인 기계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바로 대답하고 교수는 만족한다.

     

    정의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공통적인 것, 일반적인 것들의 특징들을 추려서 제한해 놓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장미, 수선화, 진달래 등은 각각의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꽃이라는 개념은 그런 고유한 특징들을 제외하고 공통된 특징만을 가지고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것들을 정의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고 제한적인 지식이다.

     

    차투르가 하고 있는 대답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시 그대로 내 뱉는 과정이다. 차투르가 학생 대표 연설을 할 때, 사서가 적어주는 것들을 그대로 외우다가 큰 망신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대답했던 것과 비슷하게 호기심과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적만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란초는 기계가 아닌 유일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남들이 배워 알고만 있는 사실들을 끊임없이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 적용시킨다. 제한적인 정의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언어로 고유한 지식을 체득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회견 도중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아 중국 기자가 질문을 요청했고, 한국 기자들에게 다시 질문권을 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 없이 중국 기자가 대신 대답한 일을 기억할 것이다.

    지식층이라고 불리는 기자들마저도 질문을 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인재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무리하며


    세얼간이


     

    우리 주변에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 일을 정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답은 찾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이지만 개인으로서의 주체적인 나가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속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움을 가진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겁을 먹는다.

    우리는 마음을 속여 줄 필요가 있다.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용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바로 바라보며 오롯이 주체적인 나에 초점을 맞추고 질문을 해보자

    어떤 결정을 하면 나로서 자유로워 질까?

    어떤 배움을 통해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면서 더 행복해질까?

     

    우리 사회는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 동일성 보다는 차이성의 공존, 추상적 이상 보다는 구체적인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주체적인 나는 오롯이 나만이 찾을 수 있다.


    떳떳한 나에게 인정받고 밀리미터에서 킬로미터가 되는 그날까지

    우리 인생 모두 알 이즈 웰


    세얼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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